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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쳐서 사랑하시는 하나님

20 중 12 일째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한다.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을 요구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강권적으로 역사하셔서라도…’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대개 나의 지혜와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싶을 때에 이런 식으로 기도합니다. 그 사람이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들어서라도 꼼짝없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심정적으로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가 믿는 하나님께 합당한 기도일까요? 하나님은 무엇이든 사람에게 무엇인가 강제로 하는 법이 없으십니다. 어떤 일을 하시든지 언제나 먼저 우리 인간에게 선택권을 주십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하나님은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신30:15). 물론 하나님의 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명과 복’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강제되어 있지 않습니다. 선택은 언제나 인간의 몫입니다. 하나님은 그냥 ‘너희들이 생명을 택하면 참 좋겠다…’고 당신의 소망을 말씀하실 뿐입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항상 이런 식입니다. 에덴동산에 선악과를 만들어 놓고 그것만은 따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따 먹으면 죽게 될 것이라고 경고도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소망사항이고, 그 선택은 어디까지나 아담과 하와의 몫이었습니다. 만일 최초의 인간에게 그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면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지도 않았을 테고 인류는 타락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선택권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냥 로봇일 뿐입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듭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유의지의 선택권이 인간의 최대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의 기대에 부합하기 보다는 그와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인류가 태초부터 씨름해온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가나안 땅에 들어간 이스라엘은 슬프게도 그들 앞에 놓인 생명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에덴동산에 심어놓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처럼, 사망과 저주의 겉모습은 언제나 먹음직하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암직하고, 탐스럽습니다. 인간의 욕심을 자극하고 결국 욕심 따라 선택하게 합니다. 자기 욕심 따라 선택하며 사는 인생은 언제나 최초의 인간과 닮은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담의 후예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강권적인 개입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들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선택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선택할 수 있는 동안 우리는 인간이지만,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또한 우리 몫입니다. 앞으로 우리의 삶은 수많은 선택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생명을 선택할 것인가, 세상 욕심 따라 사망을 선택할 것인가…, 그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매일 같이 직면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순간의 선택이 영원을 좌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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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소개

고쳐서 사랑하시는 하나님

본 묵상은 한강중앙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유요한 목사님의 ‘목회서신’ 중에서 발췌했습니다. 본 묵상을 통해 변치않는 마음으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깊이 깨닫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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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를 제공해 주신 한강중앙교회 유요한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내용에 관해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시면 한강중앙교회 홈페이지 http://hangang.onmam.com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