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함이 없는 하늘의 샘보기
[우리에게 명하신, 속죄제]
제사에는 본인이 원해서 드리는 '자원제'(번제, 화목제)가 있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드려야 하는 '의무제'(속죄제)가 있습니다. 말씀을 잘 몰라서,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서 멀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죄였음을 느끼고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반드시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인간은 죄를 합리화하고, 변론하며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질병을 키우듯, 죄를 키우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연약하고 무지한 한계가 있어 알고도 모르고도 죄의 자리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사실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속죄제'를 명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권세로 선포하며 정결함을 덧입을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는 제사장도, 회중도, 그 어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얼굴(자비)을 뵐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제사장의 죄를 비중있게 말씀합니다. 지도자의 죄과는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성경은 대제사장의 부주의 또는 태만으로 인해 죄를 지은 것은 "백성의 허물"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백성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제사장은 황소를 끌고 와서 그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한 다음 여호와 앞에서 잡았습니다. 여기서 안수기도는 자신과 제물을 동일시하는 상징적 의미로,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다짐과 결단의 고백을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이러한 자신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럽더라도, 대가를 지불하고 죄를 처리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살길이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와 속죄제에서, '기름'과 '콩팥'을 태워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된다"(3장)고 말씀합니다. 구약에서 '기름'은 고기 가운데 가장 좋은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고로 '기름을 드린다'는 것은 제물의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입니다. 또 당시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의 감정(심장)이 내장 중에서 특별히 '콩팥'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 콩팥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제사자가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의미였습니다. 이것은 의미 상 볼 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는 말씀과도 통합니다. 속죄제를 위해 드린, ‘제물의 피’는 '휘장' 앞에서 일곱번 뿌리고, '분향단'의 뿔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피는 전부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 밑에 쏟아버렸습니다. 제물로 드린 고기들 또한, 완전히 번제로 태웠습니다. 이것 역시 남겨서는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죄에 대한 완전한 단절(완전한 속죄)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물의 일부를 남기는 행동은 '죄'와 '죄의 열매'를 아까워하거나, 다시 그같은 행위를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의 모양만을 갖추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기도로 통해, '성령의 불'로 완전히 태워 정결케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번제단'위에서, 기도의 '장작'으로 태워, 육은 죽고 날마다 영으로 새롭게 사는 은혜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속죄제입니다.
제사에는 본인이 원해서 드리는 '자원제'(번제, 화목제)가 있고, 하나님의 명령으로 드려야 하는 '의무제'(속죄제)가 있습니다. 말씀을 잘 몰라서,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의 뜻과 기준에서 멀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다가 그것이 죄였음을 느끼고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에 반드시 '속죄제'를 드려야 했습니다. 인간은 죄를 합리화하고, 변론하며 은근슬쩍 넘어가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질병을 키우듯, 죄를 키우는 어리석은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연약하고 무지한 한계가 있어 알고도 모르고도 죄의 자리에 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이 사실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속죄제'를 명하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권세로 선포하며 정결함을 덧입을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는 제사장도, 회중도, 그 어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하나님의 얼굴(자비)을 뵐 수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 본문은 제사장의 죄를 비중있게 말씀합니다. 지도자의 죄과는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성경은 대제사장의 부주의 또는 태만으로 인해 죄를 지은 것은 "백성의 허물"이 된다고 말씀합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백성을 대표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 제사장은 황소를 끌고 와서 그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한 다음 여호와 앞에서 잡았습니다. 여기서 안수기도는 자신과 제물을 동일시하는 상징적 의미로, 제물의 머리에 손을 얹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는 마음의 다짐과 결단의 고백을 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이러한 자신을 볼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럽더라도, 대가를 지불하고 죄를 처리해야 합니다. 이것만이 살길이며,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덧입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회개할 때,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와 속죄제에서, '기름'과 '콩팥'을 태워 드리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 아름다운 향기가 된다"(3장)고 말씀합니다. 구약에서 '기름'은 고기 가운데 가장 좋은 것으로 인정했습니다. 고로 '기름을 드린다'는 것은 제물의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말입니다. 또 당시 세계관에 의하면, 인간의 감정(심장)이 내장 중에서 특별히 '콩팥'에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두 콩팥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제사자가 온 마음과 정성을 쏟아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의미였습니다. 이것은 의미 상 볼 때,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찌니라"는 말씀과도 통합니다. 속죄제를 위해 드린, ‘제물의 피’는 '휘장' 앞에서 일곱번 뿌리고, '분향단'의 뿔에 발랐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피는 전부 성소 뜰에 있는 번제단 밑에 쏟아버렸습니다. 제물로 드린 고기들 또한, 완전히 번제로 태웠습니다. 이것 역시 남겨서는 안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죄에 대한 완전한 단절(완전한 속죄)을 의미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제물의 일부를 남기는 행동은 '죄'와 '죄의 열매'를 아까워하거나, 다시 그같은 행위를 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태도'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의 모양만을 갖추어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죄를 회개기도로 통해, '성령의 불'로 완전히 태워 정결케 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번제단'위에서, 기도의 '장작'으로 태워, 육은 죽고 날마다 영으로 새롭게 사는 은혜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속죄제입니다.
묵상 소개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하늘의 샘은 오직, 주님께만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 주님이 보이신 구원의 길을 따라갈 때, 그 '순종'의 길에만 다함이 없는 하늘의 샘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존중히 여길 때, 주님도 우리를 존중히 여겨주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받으며 새김으로, 다함이 없는 풍성한 은혜를 누리며 흘려보내는 축복의 통로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 묵상은 하늘샘교회 홈페이지에 담긴 이호석목사의 칼럼 중에 발췌하여 편집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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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를 제공해 주신 하늘샘교회 이호석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문의 사항이 있으시면 하늘샘교회 홈페이지 http://www.heavenspring.co.kr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