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피하는 자보기

하나님께 피하는 자

21 중 15 일째

복된 헌금 생활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물질의 욕심에서 자유롭기가 쉽지 않습니다. 가지면 더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는 그 물질의 욕심에서 자유로운 공동체였습니다. 그들은 자기 재물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았습니다(행4:32). 그들에게 ‘네 것’ ‘내 것’이 따로 없었던 것입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예수 믿는 사람들은 더 이상 남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말 그대로 주안에서 한 형제요 자매였습니다. 다른 형제의 부족함은 내가 채우고, 나의 부족함은 다른 형제들에 의해서 채워졌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에는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행4:34)고 합니다. 남들보다 조금 넉넉한 형편에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서 헌금을 드렸고, 사도들은 그 헌금을 필요한 만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기 때문입니다. 성령과 은혜가 충만한 그들에게 ‘드림’과 ‘나눔’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상적인 아름다운 공동체 안에서 ‘옥에 티’ 같이 불미스러운 사건이 하나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행전 5장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들은 남들이 다 그러듯이 자기들도 땅을 팔아서 헌금을 하기로 작정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땅을 팔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얼마를 감추어 두고, 그 나머지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습니다. 베드로는 족집게처럼 아나니아의 변한 마음을 읽어 내었고, 아나니아는 그 자리에서 엎드러져 죽습니다. 이 일이 예루살렘 교회와 성도들에게 큰 두려움의 교훈이 되었습니다.

헌금은 자원하는 마음으로 내는 것입니다. 자원하지 않는 것은 헌금이 아니라 세금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에게 땅을 팔아 전액을 헌금하라고 강요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의 마음이 도중에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왜 아깝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우선 헌금을 하기로 작정할 때에 어떤 불순한 동기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모두들 다 하는데 내가 하지 않고 있으면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쩌면 사도행전 4장에 언급된 요셉처럼 헌금을 하고 나면 자기도 사도들에게 인정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더 강한 인상을 심어주려면 요셉보다 더 많은 액수를 헌금해야 한다고 계산했을까요. 그런데 정작 팔고 보니 아까운 생각이 들었겠지요. 그래서 얼마를 감춰두고 나머지를 헌금했을 것입니다.

정직하지 못한 헌금은 그 액수의 고하를 막론하고 하나님이 즐겨 받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에게 과시해 보이려는 헌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번 ‘내 돈’을 바친다고 생각하면 헌금에 인색해 질 수밖에 없습니다.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내 믿음의 분량입니다. 하나님은 헌금과 함께 내 삶을 받으십니다. 정직한 헌금은 자신에게 복이 될 뿐 아니라, 공동체에게 또한 복이 됩니다. 우리는 지금 ‘복된 헌금 생활’을 하고 있는지 한번쯤 신중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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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소개

하나님께 피하는 자

이 글은 한강중앙교회 담임목사님이신 유요한 목사님의 ‘목회서신’ 중에서 발췌했습니다. 본 묵상을 통해 우리의 참된 도움과 치유자 되시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은혜 누리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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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자료를 제공해 주신 한강중앙교회 유요한 목사님께 감사드립니다. 묵상내용에 관해 더 알고 싶은 것이 있으시면 한강중앙교회 홈페이지 http://hangang.onmam.com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